한편 슈만의 부인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의 우정도 깊어져 갔다. 1862년 9월 빈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하였는데, 이때의 관현악단을 통한 실지 체험은 1876년에 완성된 《제1교향곡》에 잘 나타나 있다. 브람스의 작곡가로서의 진면목은 이때를 전후하여 발휘되기 시작했고 대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1878년 이후 매년 걸작을 발표하였는데, 《바이올린협주곡(D장조)》(작품 77) 은 이 무렵에 발표된 것이다. 1879년 브로츨라프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이에 대한 사의로 그 이듬해 《대학축전서곡》(작품 80)을 작곡하였다. 이어 1890년까지 《비극적 서곡》(작품 81), 《피아노협주곡 제2번》(작품 83), 등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1890년부터는 체력과 창의력의 쇠퇴를 자각하고 대곡의 창작을 단념, 신변 정리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1891년 3월 뛰어난 클라리넷 주자 R.뮐펠트의 연주를 접하자, 다시 영감과 창의력을 얻어 1891년 《클라리넷 3중주곡》(작품 114) 와 1894년 두 곡의 클라리넷소나타 등 일련의 클라리넷을 포함한 실내악곡을 쓰게 되었다.
1896년 3월 그의 평생의 친구인 클라라가 졸도한 후 병세가 악화되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성서를 토대로 한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를 작곡하였다.
5월 20일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오르간용의 종교적인 오르간곡 《11의 코랄전주곡》(작품 l12)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1897년 4월 3일 마침내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오페라 이외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음악은 독일음악의 전통을 보수적일 만큼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때로는 북독일적이며, 때로는 빈(Wien)적이지만, 인간 브람스의 피가 흐르는 매우 소박한 풍격이 그의 음악의 큰 매력이 되고 있다. 그만큼 브람스의 작품에서는 호화스런 색채감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프로테스탄트 신자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이면서도 죽음의 예감이 감도는 장중한 작품들이 많으며, 특히 만년에 발표한 성악곡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다.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화려한 시대에 있어 고전파음악의 전통을 지킴으로써, 시대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는 독자적 작풍을 견지한 작곡가이다. 또한 그는 R.슈트라우스, A.드보르자크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두산 대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