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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첼로의 거장 피에르 푸르니에. 생상의 첼로 협주곡 1번 작품 33 에 해당하는 글1 개
2011.07.09   첼로의 거장 Pierre Fournier(피에르 푸르니에) - Saint-Saens 의 Cello Concerto No.1 in a,Op.33 22


icon 첼로의 거장 Pierre Fournier(피에르 푸르니에) - Saint-Saens 의 Cello Concerto No.1 in a,Op.33
Classic/Pierre Fournier | 2011. 7. 9. 22:17


첼로의 거장 Pierre Fournier(피에르 푸르니에)





피에르 푸르니를 매우 재밌게 소개 한 글이 있어서 길지만 소개합니다
연주곡 들으시면서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조이 클래식" 2001년 1월의  유윤종님의 글에서--
 

피에르 푸르니에는 프랑스 사람이니 바이올리니스트 장 푸르니에의 동생이다. 일찍이 폴 토르틀리에와 벗하여 즐겨 담론하며 지냈다.
어느날 토르틀리에의 연주를 들은 푸르니에가 탄식하여 가로되, "그대의 왼손을 내가 가졌더라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토르틀리에가 크게 웃으며 화답하여 말하기를, "오히려 내가 그대의 오른손을 가지기 원하노라" 했다.
대저 이는 모든 현악하는 자들이 고민하는 것이다. 왼손은 지판을 짚는 손이니, 소리의 잽싸고 날렵함과 엄정함이 왼손으로부터 온다. 오른손은 활을 잡거나 줄을 뜯는 손이니, 소리의 크고 작음과 억세고 부드러움이 여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왼손이 기교라면 오른손은 정감이니, 푸르니에는 짐짓 토르틀리에의 정확한 기교를 탐하였음이거니와, 토르틀리에는 푸르니에의 온화하고 정감있는 연주를 기꺼이 더 상찬하였음이라.
푸르니에의 아비는 프랑스 군대의 장수였다. 혼인하여 아들 피에르를 낳으니 1906년이었다. 어미가 피에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니 기꺼이 곧잘 따라하여 주변이 즐거워했다.
피에르가 아홉 살 때 열병을 앓았다. 열이 가신 뒤 바로 걷지 못하였다. 의원이 소아마비증이라 하였다. 부모가 탄식하여 가로되,
"페달을 밟지 못하니 피아노는 더 못 하겠구나!"
하였다. 아이가 몸이 성치 못하여 서러워 할 세라 첼로 선생을 두니, 아이가 즐거워하며 역시 곧잘 하였다. 날로 첼로에 열심을 기울이니, "장차 이 아이는 첼로 켜는 자가 되리라" 고 주위에서 모두들 이야기하였다.
피에르가 자라 당대의 큰 학교라 일컫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폴 바젤레르와 안톤 에캥을 사사하니 첼로 켜는 이들이 누구나 배우기 원하는 큰 스승들이었다. 열성을 기울여 열일곱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음악 듣기를 곧잘 하는 모리스 마르샬이 이때 피에르를 일컫기를,
"그는 무릇 장차 오는 시대의 첼로 명인이라."
했다. 이미 이때 그의 활긋기에 감복하지 않는 자 드물었다. 때로 흐르듯, 때로 누비듯, 미풍이 불 듯 하다 폭풍치듯 하니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당대의 기교가라 하였다.
두 해가 지나 파리에서 에두아르 콜론느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신문들이 다투어 명연이라 천재라 하여 대서특필하였다. 이 일로 유럽 큰 도시마다 그의 연주를 불러 청해 듣지 않는 곳 없게 되었다. 차츰 당대의 재사들과 벗하고 함께 연주하니 코르토 티보 슈나벨 셰링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쿠벨릭을 두루 헤아렸다.
이때 그가 말하기를 "실내악은 내가 참으로 기꺼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와 더불어 연주하는 자들도 "푸르니에와 앙상블을 맞춘 즉, 저가 이모저모를 살펴 마치 한 몸처럼 하는 지라, 편하기 이를데 없다" 하였다. 훗날 사람들이 "저가 독주자로 뛰어나거니와 실내악에 특히 일가를 이루매, 상대방을 잘 받쳐주되 감싸듯 하여 모나지 않고 흐르듯 하는 연주를 펴나감이라" 하였다. 이때 즐겨 함께 연주한 이가 티보며 코르토였으니 음반도 여럿 함께 내놓았음이라.
1933년 베를린 필하모니의 초청을 받아 푸르트벵글러 지휘로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니 박수로 장내가 떠나갈 듯 하였다. 1936년 혼인하고 1937년 에콜 노르말의 교수 자리를 얻었다.
1939년 독일 군대가 프랑스를 치니 브르타뉴의 렌으로 피했다가 돌아와 1941년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뛰어난 선생들로부터 즐겨 첼로를 배우던 곳에 돌아와 제자를 가르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했다.
1948년 뉴욕과 보스턴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자 청해왔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버질 톰슨이 듣고서 담론하기를, "살아 있는 첼로 주자 중 이보다 나은 자를 알지 못하노라. 음악을 만듦에 이보다 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자를 나는 모르노라." 했다.
곳곳에서 연주를 청하매 더 이상 제자를 가르치는 일이 버겁게 되었다. 파리 음악원 교수자리를 내놓으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1956년 일가 식솔을 이끌고 스위스 제네바에 거처를 정하였다. "집을 옮겼으나 프랑스 백성임이 당연하다" 하여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1959년 모스크바 연주에 큰 성공을 이루니 당 관료며 음악가들이 "그대의 뛰어난 연주를 우리 인민들에게 자주 들려주기를 원하노라" 했다. 이윽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심사위원도 맡으매, 1960년대 동구 서구를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연주가들이 드물었거니와 오직 푸르니에가 소련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또 상찬을 들음이라.
이때에 이르러 현대 작곡가들이 점차 선인들의 필치를 버리고 새로운 풍조를 고집하니, 사람들이 더러는 칭찬하였으나 "대저 이는 옛날의 아정한 음악과 같지 않다" 하여 내치는 이 많았다. 푸르니에가 새 작곡가들과 기꺼이 벗하고 또한 그들의 음악을 연주한 즉 마르티누와 풀랑이며 마르티농이 작품을 바치게 되었다.
이즈음에 아들이 장성하여 피아노를 곧잘 치매 이름이 장 피에르 푸르니에라. 아비와 기꺼이 협연하여 널리 이름을 내었다. 1963년에는 아비가 프랑스 레종 드뇌르 훈장을 받으니, 기뻐하며 감축하지 않는 자 없었다. 벗인 베르나르 가보티가 "저의 공로로 브람스며 바하, 베토벤이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 이르게 되었다" 했다. 아들이 도와 학생을 모으매 마스터클래스도 왕왕 열어 첼로 배우는 이들을 기쁘게 했다.
그 뒤 스무 해 남짓, 푸르니에 귀밑머리 성성하도록 첼로를 켰으니, 머나먼 동국의 세종문화회관이 문을 열자 이곳에서도 연주를 해 음악을 사랑하는 백성이 즐거워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를 할 때의 일이다. 다리 성치 않은 이가 힘들여 협주곡을 연주하고 무대 뒤로 나오니, 연주회에 관계하는 이들이 모두 "저가 이제 들어가 쉬어야 하겠구나" 하였다.
허나 분장실에 앉아있던 푸르니에 휴식시간이 지나매 다시 걸어나왔다. 무대로 들어서는 문을 반쯤 열고 의자를 끌어당긴 후에 앉는 지라 주변에서 "저가 어떤 연유로 저리하는가." 수근거리었다. 교향곡 연주가 시작되자 저가 자리를 고쳐앉더니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내지 않고 50분이 걸리는 연주를 꼬박 지켜보았다.
이에 수근대던 자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이는 함께 연주한 이들에 대한 예절이요, 음악에 대한 경의의 표시라. 몸 성치 않은 이가 이럴진대 우리 연주가들 가운데는 협연이 끝나자 마자 로비로 나가 친지의 꽃다발을 받고 들어가는 이 많으니, 이 어찌 예술하는 자의 마음가짐이라 할 것인가" 하였다.
푸르니에가 끝으로 런던 퀸 엘리자베스홀에서 연주함이 1984년이라. 이 년이 지나 1986년 갑자기 심장마비병으로 눈을 감으니 세상이 크게 놀라매 여든 살이었다.
그가 떠나니 애도함이 어찌 크지 않으리오. 글 잘 쓰는 그리스 사람 알렉산더 파나굴리스가 빗대어 "꽃이 꺾이니 정원이 뜨락의 쓸쓸함이 그지없도다" 했다. 이에 모든 이가 머리를 끄덕이며 고개를 숙여 추모했다.
대저 아정한 예술은 편벽되지 않은 인품을 낳으니, 우리 동국에서 일찍이 받들어온 사대부의 모습이 그와 같다. 푸르니에는 연주와 인품에서 기이함과 편벽됨을 버리고 온화함과 유함을 취하니, 어찌 사람들이 칭송하지 않겠는가.
모든 이가 그를 가리켜 말하며 또한 그를 대하기가 이와 같았다. 'Aristocrat of Cello'라 일컬어지니 이는 곧 '첼로의 사대부'라. 친한 이들로부터 처음 대하는 필부에 이르기까지 어질게 대했으며, 의관과 용모가 단정하니 누구나 기꺼이 벗되기를 청하였다.
"저는 나보다 훨씬 성숙하며 나의 위에 있는 자로다. 저가 친절하게 참아가며 이끌어주니 음악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배웠노라." 피아노 치는 프리드리히 굴다가 베토벤 첼로소나타 전곡을 함께 녹음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뒷날 첼로 하는 하인리히 쉬프가 굴다에게 베토벤 전집 녹음을 더불어 함께 하기 청하니, 굴다가 "푸르니에의 연주가 이미 몸에 배인 지라 다른 이와 다시 하기 불가하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저가 학문함이 또한 사대부의 귀감일지라. 주변에서 "그만하면 되었다. 이제 첼로로써 누가 그대의 고아함과 기품에 비길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궁구하고 책읽고 논하기를 언제나 그치지 않았다.
저가 평생 공력을 들여 궁구한바가 오른손과 팔의 씀씀이이니, 이는 일찍이 토르틀리에가 부러워한 바와 같다. 저가 "무릇 활긋기 (Bowing)가 으뜸이다" 하였으니, 때로 글로 쓰고 때로 제자들에 강론한 바를 모아 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왼손은 음표를 만들고 악보를 그대로 잡아내는 손이니라. 오른손은 노래하는 손이다. 두 손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허나, 소리의 다듬새를 만들어내고 프레이징을 빚어내는 데는 어찌 오른손이 근본을 이루지 않겠는가."
오른손의 '노래'을 아끼고 사랑함이 이와 같았으니, 저가 첼로를 처음 대하였을 때 남달리 더불어 기뻐한 것은 바로 첼로가 '노래하는'악기로 여겨졌음이라. '푸른 보리'라는 소설로 유명한 작가 시도니 콜레트가 저에게 '하루의 탄생'이라는 책을 바침에 "다른 어느 것 보다도 어여삐 노래할 줄 아는 피에르 푸르니에에게 드리노라"라는 헌사를 곁들인 것이 이런 까닭에서다.
허나 근자에 이르러 그의 연주를 불평하는 이 사뭇 자주 눈에 뜨이는도다. "그의 연주는 아정하되 태산같은 장중함이 드물도다." "제법 멋스럽게 그림을 그려넣은 것 같으나 작은 화폭을 보는 것 같다." 하는지라. 어찌 어리석지 아니한가. 이와 같이 불평함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장중함을 구하려면 로스트로포비치요, 힘을 구하려면 슈타커를 찾을 일이다. 세상에서 우아하다 하는 첼로의 정감이 그의 '노래하는' 오른팔에서 나왔으니, 어찌 이른바 프랑스의 '에스프리'를 그의 첼로에서 찾는다 하지 않으리오.
하물며 첼로 연주라는 것이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만을 일컫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혼자 연주하는 장중함과 기교만을 찾아 본으로 삼을 것인가. 무릇 반주악단이나 협연자와의 어울림을 더불어 논함으로써 제대로 된 연주라 일컬을 것이 아닌가. 이에 있어서 푸르니에를 따를 자 없다 할 것이다. 스스로 세련되고 고고하였으되 반주자와 협연자의 뜻을 해치는 바 없었고 두루 제 색깔을 살려낼 줄 알았으니, 특히 실내악에서 그를 능가할 자 적었음은 앞에서 논한 바와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열 다섯해. 처음에는 그를 기려 추모음반도 몇 종이 나왔건만, 이제 차츰 기억하는 이도 적어지니, 이는 세상 시속과 인심이 부박한 탓이라. 이에 서툰 붓을 들어 그의 삶과 음악을 기리고자 하노라.

 

 Saint-Saens
Cello Concerto No.1 in a,O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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